[살며 생각하며] 사람은 실수하고, 신은 용서한다
그녀가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이 어제 오후 6시 반쯤이었다. 그저께 아침에 바지 길이를 줄여달라고 우리 세탁소에 처음 온 여자 손님이었다. 얼굴도 예쁘장한 데다가 말도 조곤조곤 얌전해서 호감이 가는 인상을 가진 그 손님에게 하루를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물론 ‘좋은 하루’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가 내미는 티켓을 받아 옷을 찾으려고 옷이 걸린 컨베이어를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옷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럴 때의 당혹감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머릿속은 신경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세탁소 경력 25년이 넘은 나는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알고 있다. 첫째로 옷의 위치가 잘 못 되어 있을 경우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컨베이어에 옷이 너무 조밀하게 걸려 있을 때 옷걸이 하나에 걸려 있는 옷이 가끔은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옷이 걸려 있는 컨베이어의 바닥을 살펴보아도 손님의 옷은 찾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는 옷걸이 하나에 걸려 있는 옷은 주변에 걸린 다른 옷과 함께 엉뚱한 손님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속으로 진땀을 빼며 여자 손님의 옷을 찾고 있는 동안 너덧 명의 손님이 세탁소에 들어와 줄을 서고 있었다. 이럴 때 손님들은 어떤 생각으로 우리 세탁소를 보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속은 더 검게 타들어 간다. 결국 그 여자 손님의 양해를 구했다. 옷을 찾으러 온 손님들은 옷을 찾아서 돌아갔고, 한 더미 옷을 가져온 손님에게는 나중에 전화로 알려줄 테니 옷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결국 로사가 옷 수선을 하는 곳으로 갔다. 혹시나 하고 작업대 반대편을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손님의 옷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잃어버린 옷을 찾았을 때의 환희란. 그러나 그 환희는 순간,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준 그녀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혹시 내일까지 기다려 줄 수 있으면 돈은 받지 않을게.” 그녀는 내일 아침에 어디 멀리 가야 하기에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녀가 맡긴 옷을 돌려주는 팔에 힘이 빠져나갔다. 들어와야 할 수입도 잃었고 신용도 잃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저께는 종업원 하나가 소매가 가죽으로 된 코트를 다리다가 가죽을 망치고 말았다. 이번 주도 적자가 예상되는바 그 코트 값까지 물어주고 나면 손해는 더 지고 말 것이다. 그 여자 손님이 가게를 떠나고 나니 문 닫는 시간이 살짝 넘었다. 30분 넘게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다. 종업원들이 실수로 끼치는 손해를 몽땅 내가 다 껴안아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외웠던 영어 격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 (사람은 실수하고, 신은 용서한다) 따지고 보면 나도 실수를 많이 하는 흠 많은 사람이다. 때로 그 실수가 남들에게 알려지기도 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아내와 가족, 그리고 사회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분명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신에게 가까이 가는 거룩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순 시기를 지나며 고통이나 극기같이 교회에서 권하는 일에도 게으르고 기도마저 멀리하고 사는 나에게 바지를 잃었다가 찾은 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디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는 고작 한두 명 종업원들 실수한 것 가지고 그리 억울해하니?”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의 실수와 죄 때문에 이리 십자가를 지고 간다.” 로사가 출근하면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 지으며 인사해야겠다. ‘Como estas?’ (How are you this morning?) 김학선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실수 용서 세탁소 경력 우리 세탁소 소매가 가죽